완벽주의자 영조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1694년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무수리 출신 화경 숙빈 소생으로 이름은 금, 이후 연잉군은 봉해졌으며 숙종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하였고 경종 1년에는 왕세제에 책봉되었습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했던 신임사화(신축년과 임인년 사이에 일어난 사화로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간의 싸움으로 소론이 실권을 잡게 됨)에 대하여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영조는 소론의 영수(領袖: 여러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인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노론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니 이것을 '을사처분'이라고 합니다.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자 신임사화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관련자들에 대한 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은 복관되고 시호를 받게 되는데 노론 측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신임사화에 대한 보복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각 정파의 인사를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 정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 측이 주장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소론에 대한 보복을 주장했던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소론을 불러 소정에 합류시켰으니 이것을 '정미환국'이라고 합니다. 정미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소론은 다시 임인사화를 들고나와 노론 4대신의 잘못을 논의하고자 했고 이에 영조는 4대신의 죄명은 씻어주되 관작만 삭탈하는 선에서 소론 측과 타협했습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과 무관하게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점차 안정화되고 이 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더욱 확대해 나갔습니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 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 씨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정빈 이 씨와 영빈 이 씨에게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첫째 효장세자가 세자 책봉 후 어린 나이에 요절했기에 둘째 사도세자를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 왕이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세자나 세제가 왕 대신 정사를 돌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자의 대리청정 이후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이에 노론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 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멀어지게 하기 위해 잦은 이간질을 하였습니다. 세자에 대한 계비 등의 무고로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문책하였고 이로 인해 세자는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궁녀를 죽이거나 무당 등과 가까이하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이 커지던 와중에 계비 김 씨의 아버지 김한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변하게 되고 영조를 격노하여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세자가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뒤 뒤주 속에 가두어 굶기는 엽기적인 방법으로 세자를 죽게 만듭니다. 하지만 부자의 연은 그리 쉽게 끊지 못하는 법, 영조는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세자의 죽음 후 영조는 탕평 정국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과거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등 획기적인 조처를 내렸고 이 같은 철저한 탕평 정책으로 왕권은 강화되고 정국은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리며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사회 모든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했으며 조선 27명의 왕 중 가장 오랜 재위 기간(51년 7개월)을 보내고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가장 장수한 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던 아들,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영빈 이 씨의 소생입니다. 영조의 첫째 아들인 이복형 효장세자가 요절하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이었기에 2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매우 총명하여 3세 때 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고 합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하여 수시로 시를 써 대신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5세 때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면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들어섰고 급기야는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엽기적인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죽임을 당하기 전 사도세자는 자주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는데 그의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에 대해 무엇이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대리청정 중에 세자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하였지만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며 스스로 완벽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버지 영조에게는 아들이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왕가에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비극적인 부자지간이 되지 않았을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욱 슬프게 다가옵니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음을 맞게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너무도 젊은 28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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