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노비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솔거노비(率居奴婢)는 상전에 집에 거주하며 노동력을 수탈당하는 노비입니다. 둘째, 외거노비(外居奴婢)는 상전과 거처를 따로 두고서 상전의 토지나 국가의 토지를 경작하는 노비입니다. 셋째, 독립노비(獨立奴婢)는 상전이나 소속 관사와 관계없이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신공(身貢: 독립된 생활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국가에 내는 공물)만 납부하는 노비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가 많았으나 후기로 가면서 독립노비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는 노비의 신분이 점차 상승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비제의 붕괴 현상
조선은 노비에게도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주어졌는데 재산이 많은 노비는 자신 역시 노비를 부릴 수도 있었으며 경제적 부를 획득한 노비 중에는 자신의 노비 문서를 돈으로 사들여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또한 재산도 그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었기에 극히 일부이긴 했지만 그들 중에는 상당한 토지를 가진 부자가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화되는데 이는 조선 후기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양반의 서얼(庶孼: 첩의 자식) 자녀들과 관련이 깊습니다. 어머니는 천비 출신임에 노비 신분에 묶여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반의 자손이기에 재산을 상속받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이 노비 신분으로 부농이 되어 다른 노비들을 부농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노비 정책의 변화
조선 초기에는 공노비와 사노비의 노동력이 그들의 상전이나 국가에 의해 마음대로 수탈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 꾸준히 성장한 노비들은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예전처럼 함부로 노동력을 수탈당하지 않았습니다. 공노비의 경우에는 이전처럼 국가의 노역에 의무적으로 동원되는 일이 없어졌으며 국가사업에 인력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임금을 주고 데려다 부렸던 것이 영조 대에 편찬된 책에서 확인되었습니다. 독립노비의 경우 노(奴, 남자 종)는 면포 2필, 비(婢, 여자 종)는 1필 반의 신공을 납부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영조 31년에 이 같은 신공은 각각 반 필씩 줄었으며 영조 50년에는 비의 신공은 완전히 없어지고 노의 신공도 면포 1필로 줄어들게 됩니다. 이때부터 사노비, 공노비 모두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비추쇄사업
노비의 신분 상승이 꾸준히 이뤄지긴 했지만 전국 각지에서는 노비가 도망하는 일도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노비들은 경제적 부담을 벗은 데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분의 상승을 꾀하여 자유의 몸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노비들은 도주의 형태 뿐 아니라 상전에게서 노비 문서를 사들이는 형태로도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했으나 노비 수 격감 현상의 절대 다수는 노비의 도망 사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비들이 도망치는 사태가 급증하게 되고 전국적으로 노비의 수가 급감하자 국가와 양반들은 흔들리는 경제 기반을 다잡기 위해 '노비추쇄사업(도망 간 노비들을 색출하여 다시 노비 신분으로 돌려놓는 작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적 장치로서도 노비의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더 이상 노비제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노비면천 작업
더 이상 노비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조정에서는 노비면천(奴婢免賤: 노비가 본래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획득하는 것) 작업을 실시합니다. 다섯 명 이상의 도둑을 잡은 자, 덕행을 실천한 자, 효성이 지극한 자 등에 대해 면천을 실시하거나 부유한 노비들이 다른 노비를 매입하면 자신은 면천되도록 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 정책은 국가 공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노비 수는 유지하면서 동시에 노비들에게 면천의 기회를 열어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또 변방 지역에서는 앞서 언급한 노비추쇄를 금지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변방민의 수를 늘려 국방을 안정시키고자 함에 있었습니다. 이에 도망간 노비들은 대부분 변방으로 모여들었고 남해의 각 섬에도 역시 추쇄를 금지하였기에 노비들은 섬으로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노비 면천 사업은 영조 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정조 대에는 노비들의 신분 상승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노비제도 혁파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은 궁궐 노비인 내시노비였습니다. 하지만 정조 대에는 남인과 시파들의 반대로 내시노비 혁파가 실현되지 못했고 정조가 죽은 이듬해 노론 벽파에 의해 내시노비가 혁파됩니다. 이후에도 노비들의 신분 상승 운동은 꾸준히 전개되어 고종 31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신분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노비제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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